나는 회사를 다닐 때 부터 매달 기부하던 것을 백수가 되어서도 끊지 못하고 있다. 뭐 아주 적은 금액이라서 백수로 살아도 그 정도는 감당 할 정도이긴 하다. 수입은 전혀 없고 잔고를 갉아 먹으며 생활하고 있으니 계산기를 두들기자면 당장 중지 시켜야할 지출 내역이지만 왠지 미안해서 그냥 한달에 얼마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나는 좋은 사람일까?
한 지인의 직장 상사는 대학시절에는 화염병을 던지던 열렬한 운동권 학생이었고 지금은 정기적으로 장애인 단체에 기부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회식 문화에 대한 괴 취미로 내 지인에게 위염을 안겨줬고 다른 팀원들에게 적어도 가정의 화목을 도모해 주진 못했다. 또 내 지인은 아주 찜찜한 경로로 그에게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사랑의 리퀘스트처럼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사연을 지켜보다가 손수건으로 눈가를 흠치며 기부를 하는 게 아니라면 요즘에 말하는 '착한 활동'이라는 것들은 신파적인 감정을 동반한다기 보다 '의식있는 인간인 나를 사랑하는 활동'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윤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이러한 활동들이 정말 '착한'것인지 갸우뚱 해진다.
한번 쓰고 버려지는 비닐 봉지 대신 에코백을 이용하자는 붐이 일었었다. 패션계는 헐리웃 배우들이 매고다니는 'I am not a plastic bag'을 출시해서 패셔너블하면서도 윤리적인 소비자가 될 것을 권유했다. 나는 이런 활동들을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에코백 사용은 사람들의 의식이 진보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다만 그런 것이 '착한'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에코백에는 환경에 대한 가치보다 에코백을 들고다니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더 앞서 보인다.
그래서 요즘 말하는 '착한 소비', '착한 마케팅'의 '착한'이 문득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런 행위들로 나는 정말 착한 사람이 되는 걸까? 마치 개츠비를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는 데이지처럼, 요즘 사람들의 '착한 소비'의 동기는 '착한 소비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사랑'인 것 같다.
착하다는 것은 뭘까? 차도와 인도가 구분없이 뒤섞여 정신없게 생활하는 뉴델리의 사람들이 기차 티켓을 끊기 위해 한 줄로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사람들 보다 나쁘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착한'과 '의식있는'은 구분 되어야 한다.
나의 글은 마치 '착한'이라는 단어에 대한 말장난 처럼 보이기도 한다. '착한'이 아니라 '의식있는' 정도로 고쳐 불렸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수 도 있다. 난 그냥 사람들이 이렇게 간단하게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된다고 믿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는 엄마와 후원할 아이의 지역, 성별, 외모 까지 꼼꼼이 따져 기부하는 사람 중 누가 더 착한 사람일까?
우리는 보통 '착한'이란 단어에서 다른 사람 뒤에 자신을 놓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간단히 착해지는 행동들도 결국은 자기 만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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